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상하이 이모 저모

상하이 여행의 시작은 상하이 교외의 쟈오통 대학 (交通大學 JTU) guest house에서 시작되었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교통대학의 캠퍼스는 하나의 도시라 할만큼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문의 위용

캠퍼스의 일부 모습

이틀간의 회의를 끝내고 11월 14일 오후에 들어간 곳은 上海光大會展中心國際大酒店(Shanghai Everbright Convetion & Exhibition Center International Hotel)

첫날 저녁은 호텔 왕바오허져우자 (王寶和酒家) 에서 지금 제철인 상하이의 대표적인 게 다자셰(大閘蟹 대갑해 Hairy Crab)를 먹었다. 상하이 근처 호수에 자라는 이 게는 가을철이 가장 맛있는 때라고 한다. 우리는 한마리에 48위안 ($8) 하는 게와 게살이 들어있는 10코스 요리를 시켰다.




다음엔 황푸강 양안의 야경을 보면서 와이탄을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걸을수 있도록 잘 정비되어있는 상하이 제일의 관광명소이다.

낮에 본 와이탄 풍경
상하이 박물관
상하이라오청황마오上海老城隍廟 City God Temple
위위안 (豫園)
쥬취챠오(九曲橋)와 난샹만터우덴(南翔饅頭店)
상하이라오졔(上海老街)
징안쓰(靜安寺)의11 ton 크기의 白玉佛 과 15 ton 크기의 銀佛

2010년 8월 2일 월요일


Vietnam의 하롱베이는 UNESCO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섬의 숲 속에 세워진 광고판 같은 것은 바로 UNESCO 세계자연유산이란 표시이다.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 나와 같이 관광을 갔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표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산에도 가끔 자연보호라는 커다란 간판이 자연경관을 해치며 서있는 것을 볼수있다. 그 뒤에 무선전화 기지국 안테나가 있다고 들었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지 모르겠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불국사 저녁 예불

2010년 6월 15일 저녁 7시경 경실과 Peter와 같이 경주 불국사에서 스님들이 법고를 치는 모습을 보며 그 소리를 들었다. 法鼓는 사찰의 사물(四物: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하나로 모든 짐승들을 위해서 치는 것이고, 木魚는 물에 사는 모든 생명을 위해, 雲板은 날아다니는 모는 생명을 위해, 그리고 梵鐘은 모든 인간을 위해 아침과 저녁으로 울리는 기물이다.

사찰의 저녁 예불이 시작될때 텅빈 조용한 사찰 경내에서 스님들이 법고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소리를 들으면 깊은 감명을 받게된다.

2010년 4월 1일 목요일

신라인의 국제교류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거의 찾아볼수 없는 유리그릇이 신라의 적석목곽분(돌무지 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유리 제작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된 이 유리제품들은 그 형태나 제작수법이 남러시아, 지중해, 근동지방에서 출토되는 Roman Glass와 유사하기 때문에 비단길을 통해 들어온 교역품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즉 6세기 중반 이전에 신라 사람들은 서역인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수있고, 무덤에 껴 묻은 것으로 보아 얼마나 귀하게 여겼던 가도 알수 있다.

대외교역의 증거가 되는 유리 제품과 다른 유물들:


특히 황남대총 (5세기)에서 발굴한 봉수병은 부러진 손잡이를 금실로 감아 수리한 점에서 당시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수있다.


높이 24.7 cm, 국보 193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잔 천마총(6세기) 높이 7.4cm 보물 620호 국립경주박물관



상감유리목걸이: 경주 미추왕릉지구 출토, 5~6세기, 24.0cm 보물 634호


왼편 목걸이의 지름1.8cm 정도의 파란색 유리구슬에는 사람의 얼굴과 새, 구름 나무등이 상감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 쪽은 그 확대 사진으로 하얀 피부와 파란눈, 붉은 입술을 가진 이국적인 여인의 모습을 볼수있다.




교역품 중에 가장 뛰어난 물품은 아마도 아래의 장식보검이 아닐까?

1973년 미추왕릉 지구의 규모가 작은 적석목곽분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되어 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이었으나 금년에 정밀검사를 통해 새로이 많은 사실이 밝혀진 유물이다. (현재 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시중 2010년4월25일까지)


황금과 석류석(Garnet)으로 장식된 장식보검: 길이 36cm 보물 635호


위의 유물들을 볼때 신라인이 6세기 중엽이전에 이미 중국뿐 아니라 서역까지도 갔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서역인이 신라로 왔었을 것도 추정할수 있다. 경주 용강동의 8세기 무덤에서 나온 토용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홀(笏)은 그가 신라에서 관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관상 8세기 17.0cm
경주 괘릉 (원성왕릉 8세기말)의 무인석 역시 외래인의 정착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수있다.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경주에 가면

신라는 기원전 57년 1대 박혁거세로 시작하여 935년 56대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귀의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경주는 천년 가까운 기간 동안 신라의 서울이었다. 따라서 경주에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경주 시내에는 지금도 크고 작은 무덤이 백여기나 남아있다. 외곽의 무덤을 합치면 수천기의 무덤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번호를 매긴 무덤이 155기였고 후에 발굴에의해 형체가 사라진 수많은 무덤이 더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시내 전경 - 대릉원과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1970년대 공원을 조성하기위해 민가를 이주하기 전에는 무덤과 민가가 혼재하고 있었다.

1958년 경주


최초의 금관은 1921년 민가의 뒤뜰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보고를 받은 일제 당국이 발굴한 결과 금관 외에도 많은 금제품이 출토되었고 이 무덤의 이름을 금관총이라 하였다.(현재 봉분은 없고 자리만 남아있다)

금관총금관


그뒤로 금령총(1924년)과 서봉총(1926년)에서 금관이 발굴되었고 1974년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두개의 금관이 정식 발굴되었다.

금제품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이 무덤들이 어떻게 도굴이 되지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는가?
그것은 신라에만 있었던 특수한 무덤구조의 덕이었다. 사람 머리크기의 강돌로 관과 부장품이 들어있는 나무 곽 주위를 두껍게 덮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었기 때문이다. 돌을 모두 들어내야만 하는 도굴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무덤을 돌무지 덧널무덤 積石木槨墳 이라고 한다

이 무덤에는 누가 묻혀있었을까?
금관은 누가 썼을까?
왕이?
시내에 있는 이 무덤들은 4세기에서 6세기 중반사이에 만들어진 무덤들이다.
그 기간 동안에 있던 왕은 내물마립간부터 지증마립간까지의 6명 정도. 게다가 금관 하나는 황남대총 북분의 여자의 무덤에서 나왔고 금령총의 피장자는 15세 전후의 아이였다고 한다.
따라서 왕이 아니라도 이렇게 화려한 금관을 썼거나 소유했음을 알수있다.

그러면 왕은 어떤 관을 썼을까?
위의 금관보다 작지만 훨씬 정교하고 아름답고 단단하게 만든 모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천마총 금관모


당시에 어디서 그 많은 금을 가져왔으며 누가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그 귀중한 것들을 무덤에 묻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확실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
추측하건대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인 그 시대에는 현세와 내세가 이어진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생존시에 가지고 있던 귀중품과 여행에 필요한 도구와 순장자까지도 함께 묻었던 것이 아닐까?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신라의 릉묘제도는 석실분으로 바뀌었고 무덤은 도심에서 외곽으로 나가게 되었다. 순장제도는 폐지되었고 화려한 장례제도도 제한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