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기원전 57년 1대 박혁거세로 시작하여 935년 56대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귀의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경주는 천년 가까운 기간 동안 신라의 서울이었다. 따라서 경주에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경주 시내에는 지금도 크고 작은 무덤이 백여기나 남아있다. 외곽의 무덤을 합치면 수천기의 무덤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번호를 매긴 무덤이 155기였고 후에 발굴에의해 형체가 사라진 수많은 무덤이 더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시내 전경 - 대릉원과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1970년대 공원을 조성하기위해 민가를 이주하기 전에는 무덤과 민가가 혼재하고 있었다.
1958년 경주

최초의 금관은 1921년 민가의 뒤뜰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보고를 받은 일제 당국이 발굴한 결과 금관 외에도 많은 금제품이 출토되었고 이 무덤의 이름을 금관총이라 하였다.(현재 봉분은 없고 자리만 남아있다)
금관총금관

그뒤로 금령총(1924년)과 서봉총(1926년)에서 금관이 발굴되었고 1974년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두개의 금관이 정식 발굴되었다.
금제품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이 무덤들이 어떻게 도굴이 되지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는가?
그것은 신라에만 있었던 특수한 무덤구조의 덕이었다. 사람 머리크기의 강돌로 관과 부장품이 들어있는 나무 곽 주위를 두껍게 덮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었기 때문이다. 돌을 모두 들어내야만 하는 도굴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무덤을 돌무지 덧널무덤 積石木槨墳 이라고 한다

이 무덤에는 누가 묻혀있었을까?
금관은 누가 썼을까?
왕이?
시내에 있는 이 무덤들은 4세기에서 6세기 중반사이에 만들어진 무덤들이다.
그 기간 동안에 있던 왕은 내물마립간부터 지증마립간까지의 6명 정도. 게다가 금관 하나는 황남대총 북분의 여자의 무덤에서 나왔고 금령총의 피장자는 15세 전후의 아이였다고 한다.
따라서 왕이 아니라도 이렇게 화려한 금관을 썼거나 소유했음을 알수있다.
그러면 왕은 어떤 관을 썼을까?
위의 금관보다 작지만 훨씬 정교하고 아름답고 단단하게 만든 모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천마총 금관모

당시에 어디서 그 많은 금을 가져왔으며 누가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그 귀중한 것들을 무덤에 묻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확실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
추측하건대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인 그 시대에는 현세와 내세가 이어진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생존시에 가지고 있던 귀중품과 여행에 필요한 도구와 순장자까지도 함께 묻었던 것이 아닐까?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신라의 릉묘제도는 석실분으로 바뀌었고 무덤은 도심에서 외곽으로 나가게 되었다. 순장제도는 폐지되었고 화려한 장례제도도 제한을 받게 되었다.